법주사

상가지대를 지나 속리산에 들어가면 길정면으로 보이는 속리산 능선(문장대에서 묘봉에 이르는 능선)이 암봉미를 가미한 수려한 산악미로 뒤를 둘러치고 있고 그 안쪽의 남서로 뚫린 계곡의 안쪽 넓은 터에 법주사가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법주사는 절 입구에 왼쪽의 수정봉이나 오른쪽 639봉이 바트게 자리잡고 있어서 조금 비좁은 듯하지만 이곳을 통과하면 널찍한 평지 절터에 당우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거찰로 우리 앞에 다가온다. 이러한 거찰의 면모는 입구 좌측의 청동미륵불입상이라든지 기록으로는 황룡사 구층탑등 목조불탑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현재 우리에게 남은 유일의 목조불탑인 팔상전(국보 우리나라에 중층 절집으로 첫손가락에 꼽는 팔상전이 우뚝하여 찾는이들에게 법주사의 위상을 간단하고 결정적으로 각인시켜준다.

사진:마애불(보물 215호)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년) 의신조가가 창건한 절이다. 법주차의 창건에 따른 작은 설화에 의하면 천축국에서 불법을 구하고 공부를 마친 뒤 귀국하여 절지을 땅을 구하러 다니던 중 조사가 타고 다니던 노새가 지금 법주사터에 오자 울부짖어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돌아보니 산세가 수려하여 가히 절지을만한 터라 이곳에 절을 짓게 되었다고 하고 절의 이름은 노새에 경전을 싣고 다니던 터이고 노새와 함께 머문터라 법이 이곳에 머물렀다는 의미로 법주사라 부르게 되었단다.
법주사는 창건된 이후 지금까지 수없이 중창을 거듭하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의 거찰로 형성되었다. 서기 77년에 진표율사와 영심사가 중창을 했고 그후에서 모두 8번의 중창을 거쳤다. 조선조중기에는 60여동의 당우, 70개소의 암자를 거느렸으나 임진왜란을 당하여 거의 소진되었다. 그러다가 인조대에 벽암스님이 다시 중창하였다. 벽암선사가 중창할 때 팔상전을 중창, 오늘에 이르러 유일한 목조 불탑으로 남게 되었다. 현재 경내에는 대웅보전, 용화전, 원통보전, 명부전, 능인전, 조사각, 진영각, 삼성각등 전각이 있고 그밖에 10여채의 요사채가 있다.
이처럼 유서깊은 절인 법주사에는 당연히 국보와 보물이 즐비하다. 법주사 팔상전은 벽암선사에 의해 인조(조선조)때에 중건된 국내 유일의 목조 5층탑이다. 국보제 55호이다. 법주사 석련지는 석조조형물로 물을 받아 연꽃을 피웠던 대형 수조이다. 8각의 지대석에 중간장식인 연꽃잎을 엎은 모양의 장식을 마디로 하여 위쪽에 거죽에 연꽃이 돋을 새김된 거대한 원형 석조를 받치고 있는 모양이다. 국보 64호(높이 1.95m, 둘레 6.65m)이다.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쌍사자석등 역시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높이 3.3m인데 암수 2마리의 사자가 들어올리고 있는 모양의 이 석등은 신라시대의 석등중에서도 최고 걸작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국보 제 5호이다. 법주사 4천왕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의 화강암 석등이다. 이 시대의 기본 양식에 충실하고 있는 석등으로 보물 제 15호이다. 법주사 마애여래의상은 경내에 있는 타래암이라 바위에 음각된 여래상으로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여래상이다. 보물 215호이다. 불산은 대형 연꽃봉우리위에 걸터앉은 상이다. 두 발은 연판위에 올려 놓은 모습. 전체 높이 5미터.
법주사 원통보전은 보물 제 916호이다. 벽암선사가 중건한 것이나 그 뒤에도 여러번 중수되었다. 우리 전통 건축의 특징인 간결하고 단아한 분위기를 풍겨주는 건물이다. 보룰 916호이다. 정면, 측면 각 3칸이다. 법주사 대웅전은 외형으로는 이층으로 된 전각으로 금산사의 대웅전, 화엄사의 각황전등 대형 절집 건물처럼 중층의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내부는 통층으로 되어 있다. 외형으로 보아 웅장한 분위기를 주도한다. 보물 제 915호이다. 정면 7칸, 측면 4칸, 2층 팔작지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