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 백두대간도
  • 지리산
  • 덕유산
  • 미시령-황철봉-저항-마등령
  • 공룡능선
  • 악휘봉-지름티재
  • 희양산-백화산
  • 백화산-조령3관문
  • 조령3관문-하늘재
  • 하늘재-벌재
  • 백복령-청옥산
  • 문경의 백두대간 길이는 110km
  • 백두산

    백두대간이라는 말이 처음 나오는 책은 산경표이다. 산경표를 썼거나 이 책의 출간에 유형무형으로 원인을 제공했을 것이 틀림없는 신경준이란 사람은 조선조 영조때 사람으로 "팔도지지", "동국여지도"등 지지를 완성한 유수한 실학자로 유명하다. 강계부사, 순천부사등을 역임한데다가 학문이 뛰어나 위의 국가 편찬 지리서의 저술에 참여하는 등 지리학에 깊은 조예를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나라 지리학을 개척한 학자로 알려지기 보다 "훈민정음운해"를 저술하여 한글발전에 기여한 학자로 더 알려져있다. 그러다가 백두대간이 인구에 회자되면서 그에 대한 평가는 그가 남긴 지리학적 업적과 함께 재평가되기 시작했고 이제 신경준은 민족의 전통적 지리개념의 핵인 "백두대간"을 오늘에 전해준 결정적인 인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지도 편집자로 유명한 이우형씨에 의하면 백두대간과 정맥등을 중심으로 한 산줄기를 그려놓은 지도는 1557년이후에 나온 모든 지리서에 공통되어 있어서 신경준이후에 백두대간이란 개념이 생겼다기 보다는 신경준이 "문헌비고"에 전통의 산줄기흐름 지도를 토대로 산수고(山水考)를 쓴 이후 이 자료를 가지고 누군가가 표를 만든 것이 산경표의 시초라고 말한다. (조선일보간 "백두대간 종주산행")
    산경표에 의하면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끝나는 우리나라의 가장 큰 산줄기이며 여기에서 1정간 13정맥이 분기한다. 산맥개념으로는 산과 강의 유기적인 관계를 설명하지 못하는 점을 백두대간은 훌륭하게 극복해주고 있어 백두대간에 대한 인식은 빠른속도로 보편화 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현상은 등산이 국민적인 레저로 자리잡는 등 기반이 닦여져 있는 데다 이우형등 지도제작자와 "태백산맥은 없다"(조석필저)의 저술활동에 말미암은 바도 적지 않다. 어쨌거나 90년대는 우리나라 산악활동의 변화를 가져온 시기로 기록될 만하다. 종래의 1산등산위주의 산행패턴이 종주스타일로 바뀌는 계기가 바로 백두대간에 대한 보편적 인식에서 나왔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제 새로운 세기로 접어들면서 백두대간의 산행이 유행처럼 번지기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가져온 배경에는 무엇보다 우리나라 전통지리학이 우리생활과 밀착된 지리학이었다는 데에 기인한다. 국토는 좁아도 지형적으로 상당히 복잡한 산악국가인 우리나라에서 백두대간의 지리학적 설득력은 그것이 우리생활과 밀접한 것이었다는데 있다.
    "태백산맥은 없다"라는 책을 쓴 조석필씨에 의하면 전라북도 장수군 장안산 남쪽 깊은 계곡에 위치한 지지리란 마을은 장수군에 속하지만 이곳에서 발원한 개천이 남원으로 흘러내려가므로 자연스럽게 지리적으로 장수보다 훨씬 먼 남원생활권이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예는 여러군데서 발견된다. 현재 남한에서의 백두대간의 종주는 두지점에서 출발이 가능하다. 백두대간의 북쪽 끝인 향로봉 또는 진부령과 남쪽끝인 지리산 천왕봉이 그것이다. 백두대간을 종주하는데는 나이, 체력, 기후, 출발시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준비가 잘 돼 있을 경우 50일 정도도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94년 여름 무보급 단독 종주하여 화제가 되었던 길춘일씨는 71일만에 종주를 끝냈다. 그러나 그는 종주중 뱀에 물려 입원하여 종주기간이 길어진데다가 희운각에서 사정상 며칠 보내는 등 충분히 기간을 단축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리산종주

    (천왕봉에서 고리봉에 이르는 구간은 남한쪽의 백두대간마루금에서 가장 높은 고도를 보이는 지역에 해당된다. 경상남도에서 출발한 백두대간은 천왕봉에서 서쪽으로 흘러 삼각봉에 이르러서야 전라북도와 더불어 도계를 이룬다. 삼도봉에 이르는 전남지역으로 들어와 만복대에 이르러서야 전북지역으로 들어가 남원시의 면계로 전락한다.)
    작년가을 황철봉 산행시 백두대간 종주 41일만이라는 분을 만난 적이 있는데 천왕봉에서 황철봉까지 41일이라면 대단히 빠른 속도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백두대간은 빨리 끝내는 것을 능사로 하기 보다는 자기페이스에 맞게 신체적 적응력에 따라 한걸음 한걸음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 가장 좋은 종주산행의 방법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리산 천왕봉을 백두대간 종주의 깃점으로 삼을 경우 중산리에서 산행을 시작하는 것이 깃점으로 다가서기에 최단거리이므로 바람직하다. 지리산 종주는 2박 3일이나 1박 2일을 잡는 것이 보통인데 조금 빨리 할 경우 1박 2일이, 여유있게 종주하려면 2박 3일로 잡을 수 있다. 요는 배낭무게가 발걸음의 속도를 재는 바로미터가 되기 때문에 1박 2일로 지리산 종주를 끝내려면 최소한의 식량밖에 못가지고 간다는 단점이 생긴다. 구간종주위주로 대간종주를 하기로 했다면 1박2일이 좋겠지만 산을 내려가지 않고 상당기간 종주를 계속하기로 했다면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래서 중산리에서 아침에 떠났다면 세석산장에서 첫밤을 보내는 것이 좋다. 그 다음날은 벽소령이나 노고단을 택해 숙박을 한다. 지리산에서의 종주는 어느때든 추위에 대한 대비가 있어야 한다. 침랑정도는 괜찮은 것으로 가지고 가는 것이 좋다. 백두대간종주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적으로 산에서 숙박하는 일정이 잡혀있으면 숙박장비는 좋을수록 힘을 내게하는 역할을 한다. 추워서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면 그 다음날에는 제대로 된 산행을 기약할 수 없기 때문이다. 5월말에도 산장에서 자기는 추운 것이 지리산이다. 지리산은 오르내리기가 번거로운 곳이 적지 않다. 그러므로 지리산에서부터 힘을 뺄 필요는 없다고 할 수 있다.

    고기리-사치재

    (이 구간은 지리산을 끝내고 난 뒤 마을과 마을사이로 방황하는 백두대간의 맥빠진 흐름을 볼 수 있다) 성삼재에서 만복대, 정령치를 거쳐 운봉읍의 고기리로 내려서는 갈림길은 고리봉(1304.5m)에 있다. 고리봉에서 세걸산으로 이어지고 철쭉으로 유명한 바래봉까지 맥을 이룬 산줄기는 자칫 판단을 흐리게 할 가능성이 있다. 산줄기가 높고 뚜렷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두대간은 고리봉에서 북쪽 능선을 따라 내려가게 되어 있다. 고도 600여미터를 내려오면 고기리의 고촌마을이 나온다. 고촌마을에 이름으로써 비로소 지리산지역은 완전히 마스터했다고 할 수 있다. 고촌마을에서 얼마간은 백두대간이 들판으로 화한 재미있는 구간이다. 그래도 엄연히 백두대간이다. 이 구간은 백두대간의 진면목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분수령은 반드시 높은 산으로만 구획지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백두대간으로 갈린 동쪽의 남원시 운봉읍과 서쪽의 주천면은 들판의 바닥이 완전히 틀린다. 운봉읍의 해발 높이가 대충 550m내외정도인데 비해 주천면쪽은 바닥의 해발높이가 200m이하인 곳이 많다. 그 사이로 백두대간이 분수령을 이루면서 두 지역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산지는 산지대로 지리산의 형세와는 판이하게 낮고 평지마저 있어서 백두대간이 들판에서 전전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 평탄한 지대도 백두대간이다. 물이 동으로 흐르면 남강으로 들어가 낙동강이 되고 서로 흐르는 개울은 남원을 지나 섬진강이 된다. 이곳에서는 회귀하게 주촌에서 운봉으로 이어지는 730번 도로가 백두대간위를 달리는 일이 벌어진다.
    지리산 자락의 고촌마을에서 수정봉 자락의 가재마을까지 남북으로 4km정도의 평지길을 지나는 데는 특별한 문제가 없고 단지 운봉으로 빠지는 큰길로 들어서지 말고 산자락에 위치한 가재마을로 통하는 길로 들어서도록 해야한다. 이 길을 거쳐 수정봉 산록으로 올라가는 길로 가게 되는데 이 부분이 애매하여 "71일간의 백두대간(수문출판사)"을 쓴 길춘일씨는 그의 책에서 "처음에는 길이 잘 나 있었으나 갈수록 길이 희미해지더니 결국 없어져버렸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가 이 근처에서 방황하게 된 원인은 아마도 여름철의 무성한 잡초 때문이었을 경우와 좌측으로 능선날등이 있는데도 길은 날등에서 우측으로 치우쳐 있어서 혹시 백두대간에서 멀어지는게 아닌가 하고 의심을 품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된다.(실제로 길은 날등에서 우측으로 조금 멀어져있다) 수정봉으로 올라가는 산길은 가재마을 당산(뒷산)에 당당하게 서있는 소나무가 포인트이다. 길은 소나무아래로 나 있다. 이길을 따라 올라가면 능선이 되고 이어 수정봉(804.7m)이 나온다. 수정봉 정상에서는 조망이 좋지 않고 조금 더 가서 능선날등이 나오면서 지리산의 만복대에서 정령치, 고리봉, 세걸산을 거쳐 바래봉으로 이어지는 호쾌한 산줄기가 조망된다. 산줄기아래의 운봉읍일대의 평야는 지리산 산록에서도 드물게 보는 산지속 평야지대이다. 이 평야를 황산벌이라고도 한다. 황산벌의 동쪽에 황산이 뾰족하니 솟아있다. 이 지역은 지형적으로 호남과 영남의 경계선을 이룬 곳으로 옛부터 전략적으로 중요시되던 곳이다. 남으로 지리산 줄기, 북으로 사치재, 복성이재, 봉화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이 자연적 요새를 이루고 있어서 전략적으로 지키기 용이하고 지형을 활용하면 병력의 규모에 무관하게 전투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다. 삼국시대때는 신라군이 황산벌로 나와 백제의 계백을 쳐부수고 백제를 멸망시켰고 고려말에는 이성계가 이곳에서 왜구를 궤멸시켜 전사에 길이 빛난다는 황산대첩을 이룩했다.
    이수정봉에서는 2,3개의 봉우리를 지나면 여원재에 도착한다. 여원재는 함양과 남원을 잇는 주요국도인 24번도로가 지나가는 고개이다. 이 도로는 동쪽은 평탄하고 여원재를 넘으면서 꼬부랑거리며 아래로 내려간다. 여원재 길가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여원재 마루(470m)에서 숲속으로 들어가면 성터가 이따금 나타난다. 합민성이다. 이 산록은 잡목이 울창하고 길도 희미한 편이라 대간종주자들이 한결같이 기진맥진해 하는 구간이다. 그러나 성터가 끝나면서 고남산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또렷하고 능선길이 좋아진다. 고남산에는 88도로상에서도 또렷이 보이는 통신시설이 있다. 고리봉에서 고남산까지는 줄곧 북쪽으로 올라왔지만 고남산에서 백두대간은 방향을 바꾸어 동쪽으로 진행한다. 이러한 동쪽방향진행은 일부구간에서 조금씩 꼬부라지지만 대체로 매요리를 지나 가산리뒷산에 이를 때까지 계속된다. 따라서 고남산에서 매요리까지 북쪽 능선으로 갈리는 길이 있다면 전부 무시하여야 한다. 오직 동쪽으로만 방향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이 구간 즉 특히 통안재에서 유치재구간이 유난히 독도가 어렵다기 때문이다. 유치재를 지나 매요리에 이르면 백두대간은 다시 동네로 내려와 동네를 통과하게 된다. 교회와 마을사이로 대간이 이어지고 그 다음엔 운성초등교(폐교)앞에서는 큰길과 합류하여 길을 따라 동으로 진행하다가 가산리 뒷산으로 길이 이어진다. 이산에서 길은 한동안 동으로 향하다가 다시 북진하기 시작하면서 대간 88고속도로를 지나게 된다. 여기가 사치재이다. 그런데 무거운 배낭을 지고 고속도로를 횡단하는 것은 극히 위험하다. 따라서 별 수 없이 고속도로위로 난 고가도로를 이용해야 한다. 즉 매요리에서 큰길을 따라가다가 가산리 뒷산으로 올라가지 않고 산아래로 난 북서쪽 큰길을 따라가면 아래로 고속도로가 통과하는 고가도로가 나온다. 이 길은 고속도로 옆으로 진행하다가 장수로 가는 19번 도로와 합류하는데 한 가닥은 고속도로 위를 횡단, 사치마을에 가서 끝난다. 이 도로를 타야 횡단고가도로를 건널 수 있다. 사치마을에서 동북쪽 능선을 올라가면 지리산 휴게소가 지척에 보이는 사치재이다. 사치재에서 다시 능선을 타고 능선턱받이에 올라서면 북쪽으로 보이는 봉우리 부근까지 넓은 지역이 온통 산불이 휩쓸고 간 황량한 산록으로 변해있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어 능선을 내려가면 안부에 새맥이재가 있다. 새맥이재에서 조그마한 두개의 골짜기사이로 능선이 나 있다. 이 능선으로 올라가면 사리봉이다. 사리봉을 지나 능선봉 2개를 지나면 복성이재이다. 복성이재를 지나면서부터는 싸리나무와 철쭉이 얼켜 얼마간 산길을 진행하기가 어려운 지대가 나타난다. 복성이재에서 동북쪽으로 도로가 나있어 치재마을까지 갈 수 있고 치재 마을에서 서쪽으로 치재까지 도로가 뚫려있다. 치재에서 북으로 진행하여 꼬부랑재에 이르고 이어 점점 고도가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봉화산에 이르게 된다. 정상에 이르기직전 억새지대가 광활하게 펼쳐져서 장관을 이룬다. 이곳에서 산불이 나서 나무는 없어지고 억새가 자라 억새평원을 이룬 것이다. 봉화산은 919m로 꽤 높은 산으로 동쪽은 함양군, 서쪽은 장수군이다. 봉화산에 오면 북쪽으로 장안산과 백운산이 보인다. 고남산에서 봉화산에 이르는 구간의 숱한 고개는 백두대간 중에서도 낮은 곳들이라 삼국시대에는 당연히 신라와 백제간의 쟁패지역이 되었던 곳이었다.
    치재에서 육십령까지는 백운산남쪽 중재에서 한 번 고비가 있지만 대체로 고도가 높은 산줄기로 형성되어있어서 자연장벽을 이룬 곳이다. 광대치를 지나 월경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숲길로 바뀌고 길도 제법 가파르고 월경산에서 중재로 내려서는 길도 계속 내리막 길이다. 중재에서 중고개재에 이른 다음부터는 백운산까지 가파른 산길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