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보다 값진 깨달음, 산행 속 비움의 미학
자연 속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도시의 소음은 멀어지고 마음속엔 묘한 여백이 생깁니다. 산행이란 단순히 높은 곳을 오르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을 비우는 여정이며, 무거운 일상의 짐을 내려놓는 하나의 의식입니다. 흙냄새가 짙은 숲길을 걸으며, 사람은 자연스럽게 ‘비움’이라는 단어의 진짜 의미를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공허함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고 본질에 다가가는 지혜이지요.
우리가 산을 오르며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속도를 늦추는 법’입니다. 처음엔 목적지에 도달하려는 마음이 앞서지만, 어느새 숨이 차오르고, 발걸음은 느려집니다. 그 느림 속에서 비로소 나무 한 그루, 바람 한 줄기, 돌 위의 이끼까지 보이기 시작하지요. 산은 늘 말없이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멈추어라, 그리고 느껴라.” 세상은 더 빨리, 더 많이를 외치지만, 산은 ‘덜어내라’고 속삭입니다. 그 속삭임이 바로 비움의 시작입니다. 속도를 낮출 때 비로소 진짜 삶의 결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산행 중 배낭의 무게 또한 비움의 상징이 됩니다. 처음 산을 오를 때 사람들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이것저것 챙깁니다. 하지만 정작 정상을 향해 오르다 보면, 그 무게가 짐이 되어버리지요. 그래서 점점 불필요한 것을 버리고, 꼭 필요한 것만 남기게 됩니다. 그 과정은 삶과 닮았습니다. 우리는 늘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하지만, 진짜 자유는 덜어낼 때 찾아옵니다. 배낭을 가볍게 하는 행위는 결국 마음을 가볍게 하는 연습입니다.
또한 산은 ‘욕심의 한계’를 깨닫게 하는 스승이기도 합니다. 더 높은 곳, 더 빠른 속도를 원하던 사람도 산의 험로 앞에선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때론 길을 잃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비나 안개에 막히기도 합니다. 그럴 때 사람은 비로소 깨닫습니다. ‘내가 자연을 정복하려 했구나.’ 하지만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저 함께 호흡해야 할 존재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순간, 비움은 완성됩니다. 그것은 마치 거울처럼 나를 비추며, 내가 쥐고 있던 욕심을 천천히 녹여버립니다.
정상에 올랐을 때의 ‘비움’은 더욱 깊습니다. 수많은 땀방울과 고요한 인내 끝에 도달한 그곳엔 오히려 ‘채움’이 없습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없는 하늘과 바람뿐이지요. 하지만 그 빈자리가 사람의 마음을 가장 풍요롭게 만듭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비움이란, 새로운 것을 담기 위한 여백이기 때문입니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여전히 분주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그 모든 소음 밖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느껴집니다.
하산의 길은 또 다른 배움입니다. 오르막에서 얻은 비움의 마음을 지고 내려오는 길은, 일상으로 돌아가기 전의 다짐과 같습니다. 산을 내려오면 다시 사람들 사이로, 소음 속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마음 어딘가엔 고요한 여백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이 산행이 주는 선물입니다. 자연은 늘 우리에게 말합니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
결국 산행은 ‘비움’의 철학을 몸으로 배우는 수행입니다. 그것은 명상보다도 실감 나는 체험이며, 마음의 먼지를 털어내는 정화의 시간입니다. 산은 우리에게 욕심을 버리고, 속도를 늦추며, 자신을 돌아보는 법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의 끝에서 우리는 깨닫습니다. 비움은 결핍이 아니라, 가장 충만한 상태라는 것을요. 산이 우리에게 주는 진짜 선물은 정상의 풍경이 아니라, 그 길 위에서 배운 ‘비움의 미학’입니다.